저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자취도 하고 하숙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선친의 높은 교육열 덕에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선친께 감사드립니다. 가난은 유비무환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고 어머니의 요절은 아내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스승으로, 저에게 가난과 어머니의 요절은 잊을 수 없는 스승이고 영원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봉사를 하겠다고 신문에 1000여 편의 글을 썼고, 원고료는 불우이웃돕기성금으로 냈습니다. 신문에 글을 쓰는 것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가 하고 중단했던 적도 있고 지금은 별로 안 쓰지만, 신문에 글쓰기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이번에 칠순기념 문집 출판으로 모두 17권의 책을 냈고 1권당 평균 314쪽입니다. 이 17권의 책들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출판했습니다. 세월이 좋고 나라가 잘살다 보니 필리핀·뉴질랜드·호주·중국·영국·프랑스·스위스·독일 등 11개국을 여행했으며, 중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등 7개국은 아내와 함께 여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 지구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1개국을 여행하고 나니, 두
우리나라의 대학은 대부분의 대학이 없는 학과가 없을 정도니 백화점식 대학이다. 선진국의 대학을 보면, 우리는 대부분 미국 최고의 대학을 하버드대라고 알고 있다. 하버드대는 의학과 인문사회학의 많은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고 있지만 이공계는 MIT, 칼텍, 스탠퍼드대, 버클리대, 미시간대가 미국의 5대 명문대학이다. 경영학은 스탠퍼드대가 최고이고 법학은 예일대가 최고이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인문사회학은 도쿄대가 최고이고 이공계는 교토대가 최고이다. 프랑스의 에꼴 폴리테크닉과 독일의 뮌헨공대도 특성화된 세계적 공과대학이다. 우리의 대학을 보면 인문사회학은 대부분 서울대가 최고이다. 하지만 이공계는 카이스트가 부동의 1위, 포항공대 2위, 서울대 3위이다. 의학은 제75회 의사고시 학교별 합격률을 보면 서울대 84.4%, 고려대 92.6%, 연세대 88.8%, 차의과학대 100%이다. 사범대는 교원임용고시 합격률이 한국교원대가 서울대를 앞지른 지 오래되었다. 자원빈국인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인재양성을 위한 선택과 집중으로 대학을 특성화해야 한다. 대학은 구조적으로 구직자가 일자리보다 크게 많아졌다. 이런 취업 환경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대학들이 성적을 남발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이 두 속담은 요즘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진다. 보기에 좋아 떡을 집었는데 맛까지 좋으니 행운이고 칙칙한 옷 사이에서 때깔 좋은 옷을 골랐는데 같은 값이라니 이 또한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 요행이다. 겉을 치장하느라 안을 소홀히 해 품질은 기대에 미치지 못할 확률이 높고 안이 갖고 있는 약점을 숨기려고 밖을 요란하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 사회의 가치척도는 인격이 사라지고 밖으로 드러난 자동차와 집과 옷과 미모 그리고 사회․경제적 위상으로 인격과 능력을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기에 좋으면 모든 게 좋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과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를 차지하려는 섣부른 경쟁 심리를 부추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기 좋은 것에 기대어 내용을 소홀히 하거나 내용의 부실을 보기 좋은 것으로 은폐하기도 한다. 옛날 어른들은 이런 뜻으로 앞의 속담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속담의 진의는 아마도 매사에 최선을 다해 마무리를 잘하라는 충고로, 좀 더 효용가치가 큰 것을 선택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요즘의 외형중심주의는 간판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만하면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호(文豪) 셰익스피어는 끝맺음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고 했다. 유종의 미(有終의 美)란 우리말도 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하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은 수치이고 용두사미(龍頭蛇尾)는 더 큰 수치이다. 최후의 승리자가 진짜 승리자이다. 한 해가 또 지나간다. 어느덧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간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대단원(大團圓)의 막을 서서히 내리고 있다. 우리 지난날을 반성해 보자. 반성 없는 삶은 발전이 없다.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힐문하고 책망하자. 그래야 삶은 발전이 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세 가지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보자. 첫째, 나는 얼마나 성실(誠實)하게 살았는가. 둘째, 나는 얼마나 남과 비교(比較)하지 않는 삶을 살았는가. 셋째, 나는 얼마나 보람 있게 살았는가. 먼저 성실의 거울 앞에 서자. 사적인 일이든 공적인 일이든 최선을 다했는가. 만심(慢心)의 노예가 되어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는가. 남편의 전처소생을 이유 없이 미워하지는 않았는가. 로비(학연·지연·혈연 등의 빽, 금품, 향응, 아부, 선물, 줄서기 등)의 노예가 되어 연공서열을 철저히 무시한 채 근무평정을 하여 피평정자로부터 원성을
가을은 고독과 쓸쓸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가을비가 소리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날은 더욱 가을이 고독과 사색을 넘어 그리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을은 차가운 기온과 더불어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의 깊이와 추억의 그리움과 인생의 쓸쓸함을 노래한다. 가을은 텅 빈 가슴을 만든다. 그 허전한 가슴에는 수만 리 깊고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그 우물에서 그리움을 퍼 올린다. 그 그리움은 하늘의 별과 같이 애절(哀切)하다. 그 그리움은 고독(孤獨)을 씻어 주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준다. 지는 해는 아름답다는 말을 잊지 않기에 사는 동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랑도 주고 추억(追憶)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노인(老人)이 되겠다고 이 좋은 가을에 다짐해 본다. 가을은 눈물의 계절이다. 나뭇잎을 뚝뚝 떨어뜨리며 알몸이 되어가는 나무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해마다 거듭나기 위해 온몸으로 우는 생명의 몸짓으로 세상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을 떠나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맑은 공기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높은 하늘 아래서 형형색색의 불타는 단풍을 구경하는 것은 여름의 울창한 숲속을 거니는 것보다도 좋다. 태양(太陽)이 가장
단풍은 곱게 물들어 모두의 마음을 온통 붉고 노랗게 채색하고 정든 가지를 떠난다. 봄이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모진 추위와 찬바람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봄의 전령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겨울을 인내한 형형색색의 꽃들이 일제히 아우성치며 앞다퉈 피어나는 봄은 새롭게 전개될 세상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을은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정을 뒤로 하고 흘러간 날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깊은 밤 창가에는 노오란 은행잎이 지고 시간은 가을바람에 실려 또 하나의 추억을 잉태하고 있다. 파아란 하늘, 솜털 같은 구름 사이로 달이 수줍어한다.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고 풍요롭다. 산과 들은 앞다퉈 불타고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가을은 땀의 마침표다. 봄부터 농부는 열매를 바라면서 땀을 흘린다. 농부에게 있어 열매는 기쁨이고 보람이다. 삶의 존재 의미다. 열매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열매는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열매는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아니 먹힘으로 행복한 것이 열매이다. 사람은 열매보다 꽃을 더 좋아한다. 꽃에는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지만, 꽃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 그러나 열매는 그 속
스위스는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환경, 지나온 역사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고 하겠다. 스위스의 인구는 780만 명이고 면적은 남한의 40% 정도이니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한 정도의 크기이다. 그리고 국토의 75%가 산과 호수이다. 지하자원도 없는 무자원 국가여서 우리처럼 유일한 자원이 사람뿐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4개국에 둘러싸여 늘 외세에 시달리며 지내왔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가파른 산비탈에 목초를 키워 소를 길러 우유와 치즈로 겨우겨우 살았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집을 지키고 사내들은 외국에 용병으로 나가 목숨을 담보로 외화를 벌어야 했었다. 그래서 스위스는 자신들의 역사를 “생존을 위하여 피를 수출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어려웠던 지난 역사를 후손들이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이다. 스위스(Suisse)의 산업을 일으킨 것은 시계 산업과 섬유 산업이다.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과 관계가 있다. 개혁자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박해받던 프랑스 개신교도(改
예전에는 대학 졸업 시즌이 되면 꼭 보도되는 기사가 있었다. 대학 수석 졸업자와 수석 졸업자가 받은 졸업 학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수석(首席) 졸업자가 받은 대단한 대학 졸업 학점(學點)에 경이(驚異)를 표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기사를 만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보도되더라도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전 학년 A⁺를 받은 학생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신문 보도에 따르면 H대학은 75%의 학생이, S대학은 61%의 학생이 A학점을 받았다. 셋 중 둘은 A학점을 받은 것이다. 이런 지경이면 A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러니 수석 졸업자의 성적(成績)이 무슨 뉴스거리가 되겠는가. 필자는 학점이 부풀려진 원인으로 대학의 양적 팽창과 그릇된 제자 사랑을 지적하고 싶다. 현재 대학(大學) 진학자는 고등학교 졸업자의 70%(한때는 84%) 정도이고 원하는 일자리는 이에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속도는 그 전에 비해 둔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학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했다. 이제는 국내에서 신입생을 수급하기 힘들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입학정원을 강제(強制)
국제사회는 치열한 무한경쟁을 하고 있으며 올림픽에선 금메달만 인정받는다. 학자들은 세계적으로 강국이 되려면 인구가 1억은 돼야 하고 경제력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는 돼야 한다고 한다. 6․25 전쟁 후 세계 최빈국 대열에 섰던 나라가, 부존자원이 빈약한 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데는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바탕으로 한 경쟁 속의 인재양성이, 선택과 집중의 인재양성이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몇몇 교육학자들은 학생들에게 경쟁을 시키지 말라고 한다. 서열교육은 인성을 해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일부 교사들은 학력평가를 반대하고 있다. 평가를 하면 학생과 학교와 교사들 간에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은 인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핀란드는 무학년제(無學年制) 교육의 실시로 무한경쟁을 시키고 있다. 앞으로 일류국가는 두뇌를 팔고 삼류국가는 물건을 파는 시대가 온다. 다시 말해 우수한 1%가 나머지 99%를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온다. 이런 미래의 대비책으로 교육의 기회는 부여하되 잘하는 사람은 더욱 잘할 수 있게 하고 못하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능력과 소질을 살려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교육의 하향평준화는 공멸로 가는
자연(自然)은 평화롭기만 하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다. 꽃을 밟고 올라오는 나무도 없고, 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는 큰 나무는 홀로 푸르지 않다. 끝없이 늘어선 가로수나 호수 주변의 벚꽃도 아름답지만, 가로등이 켜진 뒤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면 하늘 가득 꽃 잔치가 펼쳐진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 달이라도 들어오면 달을 품은 벚꽃이 연출된다. 나무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한 걸음씩 움직여 보면 다른 가지 사이로 따라와 벚꽃에 안기는 달을 보게 된다. 여러 종류의 꽃 중에 벚꽃만큼 화사한 꽃이 또 있을까. 벚꽃이 만드는 따뜻하고 화사한 그늘, 작은 벚꽃이 모여 만드는 꽃그늘 아래에서는 모두가 아름답고 환하고 마음이 설렌다. 장미는 붉고 희고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늘을 만들지는 못한다. 벚꽃은 아주 조그만 꽃들이 알알이 뭉쳐져 커다란 하나의 꽃이 될 때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벚꽃이 만드는 그늘, 그 그늘은 느리고 화사하다. 그 느린 그늘이 우리를 감쌀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인생의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쉴 수 있다. 우리는 늘 달리고 있다. 마치 멈추면 쓰러지는 팽이처럼